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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골목길여행

나주 골목길 역사산책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22110()

 

나주

 

마한(馬韓)은 모두 54개국이 뭉쳐서 세운 연맹체다. 마한에서 떨어져나간 진한(辰韓)12개국 연맹체였던 것과 비교하면 마한이 얼마나 큰 연맹체였는지를 알 수 있다. 3세기 중엽 남하한 백제(百濟)는 천안과 직산에 버티고 있던 마한 북부연맹 대표국가 목지국(目支國)을 복속시킨다. 그러나 마한 남부연맹에 대해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한 남부연맹 중심국가는 침미다례(忱彌多禮)와 내비리국(內卑離國)이다.

 

발음과 뜻을 고려하면, 침미다례는 침명현과 도무군, 즉 해남반도와 강진만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목지국을 붕괴시키고 마한 북부연맹을 복속시킨 백제에 맞서 마한 남부연맹 국가를 하나로 결집시켰다. 가야·낙랑·중국·왜 등지로 이어지는 해상무역 중간교역지에서 영산강 유역을 아울렀던 것이다.

 

내비리국은 영산강 유역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에 있는 하천과 평야에 터를 잡았다. 3세기말 크게 성장하면서 마한 54국 중에서 13국이 집중되어 있는 전라남도 지역 마한 남부연맹에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신라 대릉원을 방불케 하는 반남 고분군 신촌리9호분에서 발굴한 금동관·환두대도·옹관묘·영산강 토기 등은 내비리국이 6세기 중엽까지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고 마한 남부연맹을 주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나주는 마한 남부여맹을 이끈 세력들이 있었던 영산강 유역 중심지역이다.

 

나주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국보 제295호 금동관. 신라 금동대관을 양식을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복암리전시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문화재청에서 복암리 고분군을 조사했다. 복암리3호분은 맨 아래 3세기부터 맨 위 7세기까지 마한 남부연맹의 묘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3세기 옹관묘에서 시작하여 6세기 백제계 석실분까지 무덤을 층층이 조영하였기에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발굴지역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에 발굴을 완료한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관을 만들었다.

 

반남과 마주하고 있는 복암리3호분에서 1996년 금동신발·유공장경소호·화천(중국 신나라 화폐삼엽문환두도·은제관식·돌베개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2008년에는 목간(木簡)도 발굴했다. 백제 역사 최초로 대사촌(代祀村)이라는 촌락명과 함께 경오(庚午)라는 간지도 묵서되어 있었다. 발굴한 토기 파편에 있는 두힐사(豆肹舍)라는 명문은 이곳이 백제 두힐현 지역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에는 회진성 성터도 그대로 남아있다. 7세기에 백제가 축조한 성인데 둘레 2.4킬로미터로 한성백제 중심지 중 한 곳인 서울 몽촌토성보다 큰 규모다. 후기신라 경덕왕 때 두힐현을 회진현이라 고쳐 부르면서 회진성이 된 것이다.

 

복암리 지역에 있었던 불미국(不彌國)이 반남에 있었던 내비리국을 능가하면서 마한 남부연맹 핵심세력으로 성장했다. 비옥한 다시들 평야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회진항을 중심으로 영산강 상류 광주 남쪽 신창동 지역과 하류를 거쳐 가야와 왜 등과 중계무역으로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복암리3호분 출토 금동신발. 가야와 왜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 장식이 이채롭다.

백제 성왕 16538년에 마한 남부연맹은 백제와 통합했다.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고쳐 불렀다. 이 무렵 백제계 석실분이 묘제로 등장한다. 전라남도 지역은 백제 영역이 되었다. 백제는 부여계와 마한계 두 정치세력으로 나뉘었다. 성왕은 백제를 마한 남부연맹과 통합하여 고구려와 맞서고자 했다.

 

백제와 통합하기 직전 영산강을 마주보며 양립했던 마한 남부연맹 주도국 내비리국과 불미국은 서로 달랐다. 반남 지역 내비리국은 옹관을 고수했다. 반남 세력은 백제와 통합한 뒤로 발전을 멈췄다. 복암리 지역 불미국은 새로운 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은 불미국의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회진항을 통해 가야·왜 등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복암리 세력은 주도권을 잡았다. 크게 보았을 때, 나주가 마한 남부연맹을 주도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남도맛기행 2021년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골목길 역사산책'에 참가한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설명을 들으면서 복암리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금성관

 

금성관은 나주목 객사다. 성종 6년부터 10년까지 나주목사로 있었던 이유인이 세웠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곳으로 관아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이곳에서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린다. 숙박시설을 갖춰서 임금이 파견한 사신이 머무르기도 한다.

 

금성관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동국진체다. 동국진체는 진경시와 진경산수화 그리고 조선중화주의 등 중쇠기에 접어든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한 조선문화(朝鮮文華)를 일컫는다. 1592년 쳐들어 온 왜 오랑캐를 1598년 물리쳤다. 그러나 1636년 쳐들어온 청은 물리치지 못했다. 인조는 청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굽혔다. 오랑캐에게 짓밟힌 국토보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백성과 등을 돌린 선비가 더 큰 문제였다. 삼연 김창흡은 조선중화(朝鮮中華)를 외쳤다. 우리 강토를 직접 걷고 제자 사천 이병연과 함께 진경시(眞景詩)를 지어서 예찬했다. 같이 걸었던 또 다른 제자 겸재 정선은 우리 산천을 빼어나게 그렸다. 진경시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열었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남도맛기행 2021년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골목길 역사산책'에 참가한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나주 객사 금성관 편액 아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금성관 편액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서예에서도 우리 글씨를 완성하여 서법의 기틀을 세우고자 했다. 성호 이익의 형 옥동 이서는 주역의 이치에 따라 획에는 음양·오행·삼정·사상이 들어 있음을 설파했다. 겸재 정선은 돌산을 양으로 흙산을 음으로 그려서 태극으로 구성함으로서 남북방화법을 한 화폭에 결합했다. 그리하여 진경산수화는 중국 화가들이 도달하지 못한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옥동은 공재 윤두서와 함께 영자팔법을 연구했다. 각 획의 운필을 삼정법(三停法)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서법의 기본을 삼았다. 왕희지를 스승으로 삼아 전수하고 각고하여 신묘하게 변화하여 마침내 도달했다. 이는 백하 윤순에게 내려갔다. 원교 이광사는 백하를 계승하고 왕희지를 본받아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재위 1720~1724)이 왕위에 오른다. 소론이 집권한다. 노론이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을 빌미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 대부분이 화를 입는다. 신임사화다. 경종 뒤를 이어 영조(재위 1724~1776)가 즉위한다. 영조 등극에 반대하고 경종을 옹립했던 소론은 실각한다. 반대로 경종을 반대하고 영조를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노론은 집권한다. 소론이었던 원교 이광사의 아버지 이진검은 강진으로 유배 간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해배 되었으나 곧 사망한다. 소론이 노론에게 화를 입힌 신임사화를 주도 한 큰아버지 이진유는 나주로 유배 간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남도맛기행 2021년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골목길 역사산책'에 참가한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나주 객사 금성관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다

객사와 동헌 앞에는 공공행사를 치르거나 국가정책을 선포할 수 있는 누각이 있었다. 나주 객사 금성관 앞 망화루(望華樓)와 동헌 제금헌 앞 정수루(正綬樓)가 바로 그 누각이다. 제주에서 나주로 유배지를 옮겨 온 소론 윤지가 영조 311755망화루에 대자보를 붙였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거병하노라. 백성이 곤궁한데 더욱 가렴주구 심하구나. 이를 구제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고자 하니 백성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이른바 나주괘서사건이다. 41명이 목숨을 잃고 20여명이 유배를 간다. 이진유도 신지도에서 장살된다. 원교 이광사는 큰아버지 이진유를 추모하듯 금성관 편액에 명필을 남겼다.

 

나주목문화관

 

아사와 내아는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아사는 고을 수령이 일하는 곳이고 내아는 생활하는 곳이다. 각각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아사는 동쪽집이라는 뜻으로 동헌이라 하고 내아는 서쪽집이라는 뜻으로 서헌이라 부른다. 정수루는 동헌 앞에 세운 누각이다. 정수루를 돌아들면 나주목문화관이다.

 

삼한일통 대업을 달성한 후기신라는 나주를 금성군이라 칭했다. 후기신라 하대 이후 진골귀족이 분열되면서 지방에서 독자적인 성읍을 만들어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면서 독립적인 영주의 지위를 누린다. 이러한 영주들 가운데 궁예·견훤·왕건 등은 마침내 국가를 건설하고 후삼국시대를 열었다. 최후의 승자 왕건은 애초에 궁예의 수군 장수였다. 911년 궁예의 명으로 금성 등지를 치고 나주(羅州)로 고쳐 부른다.

나주 골목길 역사산책에 나선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을 환영하듯 함박눈이 내린다. 나주향교 명륜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왕건은 나주 완사천에서 오씨를 처음 만난다. 훗날 장화왕후가 된 나주 오씨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고려 제2대 혜종이 된다. 후기신라 때 무주에 있는 15개 군 중 하나였던 금산군(錦山郡)이 어향 나주가 된 것이다. 어향 나주는 고려 건국과 함께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완사천 인근 흥룡동에 흥룡사를 짓고 그 경내에 혜종사를 짓는다. 흥룡사는 혜종 원찰이고 혜종사는 혜종 사당이다.

 

고려시대 지방제도는 경기·양계·오도 등 삼원구조를 이루었다. 국왕이 거주하는 개경은 그 주변 10여개 군현을 묶어 경기(京畿)지역으로 삼았고, 외적 방어를 위해 편성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은 양계(兩界)지역으로 삼았다. 개경 이남 오도(五道)지역에 주로 속현과 부곡을 거느린 주현이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전국 지방세력에게 지배영역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군현은 520여개나 되지만 지방관을 파견한 군현은 130여개에 불과했다. 지방관을 파견한 군현을 주현이라 하고 나머지 390여개 군현을 속현이라 한다.

 

성종 2983년에 지방제도를 12목으로 개편할 때 나주는 5개 속군과 11개 속현을 거느린 나주목이 된다. 제일 큰 상주목이 7개 속군과 17개 속현을 거느린 것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현종 910838목으로 개편하여 군현제도의 골격을 완성했을 때 나주목은 승주목까지 흡수하면서 현재 광주·전남지역에 유일한 목, 으뜸 고을이 된다. 20161019일 나주목문화관을 개관하여 천년고도 으뜸 목사고을 나주를 알리고 있다.

 

3917마중

 

2017년 새롭게 문을 연 ‘3917마중은 아버지를 모신 사당 난파정, 어머니를 위해 새로 지은 목서원, 곳간 등을 한옥 및 문화주택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난파정은 을미의병장 난파 정석진이 사용하던 정자를 아들 정우찬이 1915년 아버지 난파를 모신 사당으로 중건한 한옥이다. 1970년 매각한 뒤 2010년 이후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비어있던 것을 2017‘3917마중에서 한옥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하여 개장했다.

골목길여행 동아리 길따라 회원들이 3917마중 목서원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목서원은 손자 정성면이 1939년 홀어머니를 위해 다시 지은 건물이다. 1973년 재일동포 금하 서상록이 인수하여 1990년까지 금하장학회 건물로 사용했다. 이후로 줄곧 비어있던 건물을 2017년 리모델링해서 게스트하우스로 다시 쓰고 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문화주택이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소재였던 유리와 벽돌 등 서양식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멋스럽게 지었다. 서양과 일본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세히 보면 조선집이 가진 장점을 살리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서양 건축자재를 사용하면서도 조선 온돌을 깔았다. 건물 외부에 드러난 빨간 벽돌은 한국식으로 쌓았는데, 내부에 있는 아궁이에는 영국식으로 쌓았다. 한국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근대화된 조선집이다.

3917마중 목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