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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골목길여행

양림마을 골목길 역사산책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22년 1월 10일(월)

 

양림마을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광주읍성이 자리하고 있는 성내면에 땅을 매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부지를 마련하는데 실패하고 대토를 물색한다. 무등산을 마주하고 있는 양림마을 동쪽언덕에 자리를 잡는다. 광주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풍장(風葬)하던 무덤자리다. 광주사람들은 드나들기를 꺼렸지만 선교사들은 전망 좋은 언덕으로 여겼다. 이곳에 임시사택을 짓고 처음 들어 온 때가 190412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대한민국 테마여행10선 남도맛기행 2021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역사산책' 두번째날 양림마을 골목길 역사산책에 나선 골목길여행 동아리 '여사가 간다' 회원들이 윌슨 선교사 사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무덤자리를 근대문화 발상지로 바꾼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 맨 위에 묘역을 조성한다. 우리 조상들은 먼저 떠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손쉽게 갈 수 있도록 언덕 위에 무덤을 만들었다. 선교사들도 동쪽언덕을 근대사회로 가는 길목으로 바꾼다. 더 높은 동쪽언덕에 자신들을 위한 무덤자리를 조성한다. 하늘나라로 속히 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을까? 그 옛날 양림마을 언덕 위에 풍장 했던 광주 어린아이처럼 선교사들도 양림마을 언덕 위에 있다. 광주는 양림마을 언덕 위에서 근대사회로 들어간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201910월 오방 최흥종 기념관을 개관했다. 여수 애양원의 모태가 된 광주 제중원 한센병원을 개원한 주인공이다.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 1880-1966) 목사는 1880년 광주군 성내면 불로동에서 태어난다. 최학신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5살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아버지마저 17살 때 돌아가시자 방황하기 시작한다.

 

무쇠주먹 최망치라는 별명을 얻는다. 패거리와 함께 장터를 전전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 술을 마신다. 새어머니 공씨의 권유로 21살 때인 1900년 강명환과 결혼하지만 방황은 그치지 않는다. 1904년 유진 벨 선교사 임시사택 건설현장에 행패를 부리러 갔다가 김윤수를 만나면서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꼬박 엿새 동안 유진 벨 선교사가 건네 준 성경을 읽고 19041225일 유진 벨 선교사 임시사택에서 열린 성탄절 예배에 참석한다. 1907년 유진 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양림마을 오방 최흥종 기념관

선교사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1873-1918) 의사가 한센병자를 데리고 양림동에 도착하던 날 최흥종 인생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최흥종은 윌슨(Robert M. Wilson, 1928-1963) 원장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집으로 가려는 순간 의사 포사이드와 마주친다. 포사이드는 한센환자를 번쩍 들어서 말에서 내린 다음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벽돌가마 옆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 때 한센환자가 지팡이를 떨어뜨린다. 감염될까 무서워서 주저하던 최흥종이 피고름 뭇은 지팡이를 집어 든다.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예수 사랑은 고사하고 동포애조차 결여한 자신을 발견한다. 최영종에서 최흥종으로 이름 바꾼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나님사랑·이웃사랑·나라사랑, 삼애(三愛)를 실천한다. 윌슨 원장이 한센환자를 돌보고 있는 광주제중원(현 양림동 기독병원)에서 한센환자를 돌본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1000평을 기부한다. 191211월 광주나병원을 완공한다.

대한민국 테마여행10선 남도맛기행 2021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역사산책'에 참가한 길따라, 골목길여행, 여사가 간다 등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양림마을 골목길 역사산책'을 하고 있다.

최흥종에게 기독교신앙과 나라사랑은 둘이 아니다. 광주 3.1 만세운동 거사일을 1919310일 오후 2시로 정한 뒤 서울 3.1 만세운동에도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다. 파고다공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1920년 출소한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최흥종은 광주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1932년 구라협회(求癩協會)를 조직한 최흥종은 광주에서 한센환자 150명과 함께 11일 동안 걸어서 경성으로 간다. 구라대행진 도중 한센환자와 걸인은 500명으로 불어난다. 한센환자들이 조선총독부에 도착하자 전염을 두려워 한 일경들이 피한다. 최흥종과 쉐핑은 조선총독 우가끼(宇垣)와 면담한다. 한센환자 치료 및 요양 시설 자혜원 확충을 요청한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일반인을 이주시키고 섬 전체를 한센환자 갱생시설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다. 우가끼 총독은 특별열차를 운행해서 한센환자 귀환을 돕는다. 소록도에 나병환자 수용시설을 대폭 확충한다.

 

1935년 최흥종은 거세 수술을 하고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짓는다. 가사로부터, 사회로부터, 경제로부터, 정치로부터, 종파로부터 오는 다섯 가지 욕심과 집착을 버린다.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2.8 독립선언을 이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서리를 지낸 최원순(崔元淳, 1891-1936)으로부터 무등산 석아정(石啞亭)을 물려받는다. 석아정에 오방정(五放亭)을 짓고 산다.

 

1949년 의재 허백련과 함께 삼애학원(三愛學院)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젊은이들을 농촌지도자로 육성한다. 1956년 음성나환자 수용시설 호혜원(互惠園)을 나주에 설립한다. 1958년에는 폐결핵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무등산에 송등원(松燈園), 1963년에는 무등원(無等園)을 설립한다.

대한민국 테마여행10선 남도맛기행 인플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역사산책 참가자들이 양림마을 오방 최흥종 기념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66210일부터 금식기도를 시작한다. 금식기도 95일째 되던 514일 소천한다. 광주시민들은 한국인 최초 시민장을 치른다. 수많은 한센환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한다. “아버지를 외치며 오열한다. 아버지가 버린 다섯 가지(五放)에서 한 가지를 더 취하겠다는 뜻으로 육취(六取)라고 호를 지은 아들 최득은은 아버지를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최흥종 목사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1990년 정부는 독립유공자 애족장을 추서한다.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한희원미술관

 

부모님은 한희원이 열 살 되던 무렵 양림교회가 보이는 언덕 아래 나무숲 우거진 곳에 집을 마련했다. 양림마을에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문순태가 양림마을에 살면서 쓴 소설 징소리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문순태 집으로 찾아간다. 같이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잦아진다. 문순태가 37년에 걸쳐서 완성한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삽화를 그린다. 20164월에는 양림마을 한희원미술관에서 타오르는 강삽화 전시회 거리에서 만난 문학과 미술전을 연다.

한희원 화백이 인풀루언서 투어 '나주·광주 역사산책'에 참가한 회원들에게 양림마을과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양림마을 문순태 옆집에는 조소혜가 살았다.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첫사랑> 등을 쓴 작가다. 한희원의 친구 동생이다. 대학시절 1년 동안 그림을 배웠으니 한희원의 제자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만난 문학과 미술전을 처음 연 것은 지난 2003년이다. 양림마을 사람 문순태와 조소혜 그리고 김현승이 쓴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2015년 양림마을 막다른 골목에 한희원미술관을 열었다. ‘거리에서 만난 문학과 미술전을 한희원미술관에서 계속하고 있다. 동화 같은 마을 양림마을에 아파트를 짓는다. 철거 현장에서 낡은 창틀을 주워왔다. 낡은 창틀을 액자 삼아 양림마을을 그렸다. 양림마을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한희원은 양림마을에 있어도 양림마을이 그립다.

한희원 화백이 남도맛기행 나주광주 역사산책에 참가한 회원들을 위해 자신의 시집에 서명을 하고 있다.

양림마을 토박이 한희원은 2019년 한 해 내내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살면서 360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한희원미술관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트빌리시 골목길은 좁은 미술관을 세계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이남스튜디오

 

202011월 개관한 이이남스튜디오는 한국 미디어아트 허브다. 모든 작품은 양림동에서 먼저 선보이고 서울을 거쳐 세계로 나간다. 이이남 작가의 스튜디오와 미디어아트 박물관 그리고 카페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다. 그야말로 커피 마시러 갔다가 미디어아트에 압도됐다’. 양림마을은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남도맛기행 '나주&middot;광주 역사산책'에 참가한 길따라, 골목길여행, 여사가간다 등 골목길여행 동아리 회원들이 이이남 스튜디오 옥상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멀리 눈덮힌 무등산이 보인다.

펭귄마을

 

펭귄마을을 가꾼 사람은 김동균이다. 그래서 펭귄마을 촌장이라 부른다. 펭귄마을에서 40년째 살고 있는 펭귄아재에게 골목이름을 짓자고 했다. 펭귄아재는 펭귄마을이라고 답한다. 펭귄아재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뒤뚱거리면서 걸으니 펭귄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누군가 버린 다반(茶盤)을 주워서 펭귄마을이라 써 붙인다. 집주인들에게 허락을 받고 펭귄마을 벽에 작품을 전시한다. 어느 핸가 펭귄마을 골목길 안에 있는 집에 불이 난다. 타고 남은 자리에 텃밭을 일군다. 그러나 원래 텃밭이 있던 터라 마을 사람들이 먹을 채소는 충분했다. 텃밭 사이사이에도 작품을 전시한다. 어느새 펭귄텃밭이 된다.

 

버린 냄비가 새롭다. 고장난 시계가 작품이다. 망가진 악기가 예술이다. 펭귄마을에서는 그렇다. 펭귄마을을 백로마을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민속촌을 정당화하기보다 펭귄마을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짧은 다리가 보기 흉하다고 예쁘고 날씬한 다리로 바꾸지 말라는 말이다. 뒤뚱거리는 펭귄마을에 감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뒤뚱거리면서 걷는 펭귄아저씨가 어색했는데 지금은 세련된 펭귄마을이 어색하다

남구청에서 펭귄마을에 있는 집 일부를 매입했다. 매입한 빈집은 원형 그대로 살려서 갤러리로 사용하기도 하고, 예술가들이 입주하기도 하고, 예술작품이나 공예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변하기도 했다.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커피숍과 식당도 들어섰다. 업사이클링 아트의 촌스러운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전문가의 세련된 아름다움이 펭귄마을을 바꿔가고 있다. 펭귄마을이 다른 예술마을처럼 변해간다. 날렵한 서울은 서울에서만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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