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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골목길여행

남도 성지순례

지난 월요일(2016926)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나갔다. 서울지역 개신교 성직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7시에 출발했다. 전라남도 성지순례 팸투어에 참가했다. 점심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 매화마을

제일 먼저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 들렀다. 여순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한 현장 바로 옆이다. 순천 선교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호남 동부권 선교를 위해 1911년부터 순천 매산등에 선교사마을을 조성하면서 시작한다. 목포선교부에서 사역을 하던 프레스톤 선교사는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순천 선교기금을 모금한다. 귀국한 프레스톤 선교사는 순천으로 선교지를 옮긴다. 건축을 맡은 스와인하트 선교사는 불과 10년 만에 20개동에 달하는 건물을 짓고 어엿한 선교사마을을 완성한다. 이후 일제에 맞서 학교를 자진폐교하고, 한국전쟁과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순교한다. 1962년 대홍수로 각종 질병이 창궐하면서 선교사들은 더욱 바빠졌다. 교육과 선교뿐만 아니라 결핵퇴치와 사회복지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28만 여명에 달하는 순천시민 중 34.3%가 기독교인이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

목포개항장

우리나라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된 순천만 국가정원을 둘러보고 목포로 갔다. 공생원에서 비디오를 관람하고 김기남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었다. 1927년 윤치호 전도사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7명의 고아를 거두어들이면서 공생원을 시작한다. 현재까지 3000명이 넘는 고아를 길러서 사회로 보냈다. 윤치호 전도사의 일본인 아내 다우치치즈꼬는 전쟁 통에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면서 고아를 자식처럼 길렀다. 제 속으로 낳은 자식 윤기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을 정도로 자식과 고아를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1968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3만 명이 넘는 목포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시민장을 치른다. 한일 양국에서 훈장을 수여한다. 한일 양국 공동으로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제작한다. 윤치호 전도사의 외손녀 정애라 원장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목포개항장 공생원 윤치호윤학자기념관

영광

이튿날 영광으로 올라가서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 들렀다. 한국전쟁 발발 3일전인 1950623일 남로당 간첩이 영광으로 잠입한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공산군은 물밀 듯이 내려온다. 915일 연합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남침한 공산군과 남로당원 중 일부가 고립된다. 그리고 학살을 자행한다. 마치 굴비 엮듯이 성도들을 새끼줄로 엮고 목에 돌을 메달아 죽창으로 찌르고 바다에 빠뜨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교회는 재건하지 못했다. 모든 성도들이 순교했기 때문이다. 1975년 야월도 모든 주민들이 합심하여 교회를 지으면서 야월교회는 다시 시작한다. 그 순교현장에 순교탑과 기독교인순교기념관을 세웠다.

 

영광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조형물과 야월교회 순교기념탑 

저녁 7시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가슴 속에 찬양이 여운으로 남는다. 전라남도에서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관련 유적을 관광자원화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지난 3월에 시작한 이 사업은 기독교와 불교 언론인 설명회를 개최한데 이어서 팸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는 순례길을 만들고, 순례지도를 만들어서 성지순례 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국내성지순례를 할 차례다.

 

 

출처 :  GoodNews TV 2016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