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암리고분전시관
가. 복암리 3호분
• 가장 아래층에는 3세기 옹관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위층에는 7세기 전반 횡혈식 석실묘로 모두 41기나 되는 무덤이 한 곳에 층을 이루고 있다. 금제신발·은제관식·장식대도 등 위세품을 발굴했다.
• 복암리에는 가장 아래층에만 옹관묘가 있지만, 반남면 일대에는 옹관묘가 중심을 이룬다. 복암리에서는 영산강식 석실과 백제식 석실을 사용한 무덤을 볼 수 있지만, 반남면 일대에서는 영산강식 석실은 볼 수 없고 백제식 석실 무덤도 일부에 불과하다. 백제는 반남을 제외하고 복암리 중심으로 나주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 옹관 4조(4組)를 발굴했다. 백제식 석실로 무덤을 만들었지만 시신은 마한 고유 옹관에 묻었다는 뜻이다. 즉, 백제문화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였다 것을 알 수 있다.
나. 복암리 목간
• 목간을 발굴한 복암리 유적 상황을 보면, 백제 당시 발라군(發羅裙, 백제시대 나주)의 중심지는 목간을 발굴한 복암리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 객사 금성관
•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곳으로 관아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이곳에서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린다. 숙박시설을 갖춰서 임금이 파견한 사신이 머무르기도 한다.
나. 편액 금성관
• 원교 이관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한다. 동국진체는 진경시와 진경산수화 그리고 조선중화주의 등 중쇠기에 접어든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한 조선문화(朝鮮文華)를 일컫는다. 영조 즉위년 1725년 영조를 등극을 반대한 소론은 실각하고 경종을 반대하고 영조를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노론이 집권한다.원교 아버지 이진검은 강진으로 유배갔다가 영조의 탕평책으로 해배 되었으나 곧 사망한다. 신임사화를 주도 했던 큰 아버지 이진유는 나주로 유배간다. 영조 31년 1755년 나주에서 괘서 사건이 일어난다. 이진유는 신지도에서 장살된다. 금성관 편액을 쓴 연유는 큰 아버지 유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나주향교
가. 전묘후학
• 고려 성종 6년 전국 12목에 향교를 세울 때 처음 세운 듯하다. 조선 태조7년 1398년에 세울 때 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 등에 버금가는 큰 규모로 지었다. 공자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서 전묘후학(前廟後學) 구조로 만들었다. 대성전은 팔작지붕에 주심포 양식.
나. 금성별곡
• 교수 1명에 학생 90명. 1480년 교수 박성건이 지은 경기체가 “錦城別曲”이 특별히 유명하다. 나주향교 학생 10명이 동시에 소과에 합격하자 “금성별곡”을 지어서 기쁨을 표현했다.
錦城別曲(금성별곡)
박성건(朴成乾, 1414~1487)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 바다 동쪽 호수 남쪽 큰 목사가 다스리는 나주 고을
錦城山 錦城浦 亘古流峙 금성산의 물줄기가 금성포로 예전부터 흘러들도다
爲 鍾秀人才 景幾何如 아,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으니,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千年勝地 民安物阜 옛날부터 경치 좋고 넉넉한 고장에서 백성들이 편안하며
爲 佳氣葱籠 景幾何如 아, 아름다운 기운이 덮였으니,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3917마중
가. 난파정
• 을미의병장 난파 정석진이 사용하던 정자를 아들 정우찬이 1915년 난파를 모신 제당을 중건했다. 1970년 매각한 뒤 2010년 이후로 공가였으나 2017년 3917마중에서 한옥게스트하우스로 개장.
나. 목서원
• 손자 정성면이 1939년 홀어머니를 위해 다시 지은 건물. 재일동포 금하 서상록이 1973년 인수하여 1990년까지 금하장학회 건물로 사용. 2017년 3917마중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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